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스부르크 가문 (문단 편집) === [[권토중래]] === [[대공위시대]] 직후 [[루돌프 1세]]와 [[알브레히트 1세]]가 왕위를 차지했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했다. 요한 파리키다는 동생 루돌프의 아들이자 [[오타카르 2세]]의 외손자로, 상속받아야 했던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알브레히트 1세에게 넘겨주었으나 알브레히트 1세가 약속한 보상을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큰아버지를 암살했다. 그 대가로 요한은 가문 족보에서 지워졌으며 제국 추방령을 당해 [[이탈리아 반도]]를 전전하다 [[피사]]에서 객사했다고 전해진다. 알브레히트 1세 사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유력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특한 전략인 '''[[결혼]] 동맹'''을 통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각국도 결혼 동맹을 세력 강화의 기본 전략으로 활용했지만 합스부르크는 특히 그것을 잘 활용한 편에 속한다. 특히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카르니올라 공국|크라인 공국]][*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는 자신이 가져가고, 케른텐과 크라인은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괴르츠-티롤 백작 마인하르트에게 양도했는데, 마인하르트의 직계가 단절되면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넘겨주었다.]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에다가 케른텐, 현대 슬로베니아의 전신격인 크라인 공국이 더해졌고 1363년에는 [[티롤 후백국]]까지 획득하면서 현대 오스트리아 영토의 근간이 완성되었다.[* 다만,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는 오스트리아 공국, 케른텐 공국의 90%,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60%, 티롤 북부와 동부, [[잘츠부르크]], 과거 [[헝가리 왕국]] 영토 중 [[독일인]]이 많았던 [[부르겐란트]]로 구성되어,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백국,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테]], [[알자스]]와 [[슈바벤]] 일대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로 구성되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본령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했다. 다만 가문의 세력이 강해진 반면 그 세력이 한데 통일되지는 못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통적인 분할 상속을 통해 가문의 영지들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분할 상속을 막으려는 시도 자체는 꾸준히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세력을 나눠 받은 같은 가문의 통치자들은 협력하고 단결하기보다는 반목하고 갈등하기를 택했다. 그렇게 가문 내의 불화는 1세기 가량 지속되었고, 1335년 이후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및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가 가문의 영지들을 일시적으로 통일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략 이 상황을 유지했다. 14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이자 [[헝가리 왕국|헝가리]]-[[크로아트 왕국|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유럽]]을 호령하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지 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일은 제법 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에 가면 왕실이 자주 단절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그럴 경우 딸에게도 어느 정도 상속권이 인정되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동양의 경우엔 아무리 딸의 상속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자]]를 왕위에 올리거나 방계 왕족을 찾아 선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에 올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알브레히트 5세]]가 황제의 작위를 계승하여 1438년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가 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알브레히트 2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제위를 유지했다.[* 엄밀하게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잠시 황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프란츠 슈테판]]이 즉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